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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군산 초원사진관: 사라지지 않는 빛을 마음에 담아두는 일

프롤로그: 추석, 차례상 대신 길 위에 선 까닭

몇 해 전부터 부모님께서는 명절의 오랜 관습 하나를 조용히 내려놓으셨습니다.
"설에는 정성껏 차례를 지내더라도, 추석에는 온 식구가 다 함께 1년에 한 번 가족 여행을 가자꾸나."
처음 그 말씀을 들었을 때는 그저 명절 가사 노동을 덜어주려는 배려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깊어지는 부모님의 주름과 조금씩 느려지는 걸음걸이를 곁에서 지켜보며, 그 말 뒤에 숨겨진 서늘하고도 따뜻한 속내를 비로소 헤아리게 됩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서로의 눈을 마주하고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눌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이 우리 생에 영원토록 넉넉하게 주어지지 않았음을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올해 추석 연휴, 우리 가족은 서해의 오랜 바람이 머무는 도시, 군산으로 향했습니다.

군산의 어느 골목, 불현듯 멈춰 선 시간

근대의 붉은 벽돌과 정갈한 적산가옥들이 이국적이면서도 쓸쓸한 정취를 자아내는 군산의 골목길을 걷다, 문득 발걸음이 멈추어 섰습니다.
빛바랜 하얀 페인트 벽, 초록빛 차양, 그리고 단정하게 박혀 있는 네 글자.
'초원사진관'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이는 초원사진관의 간판 아래에는 후지필름과 코닥의 작은 로고가 나란히 붙어 있었습니다.
마치 어제 문을 닫고 퇴근한 주인이 내일 아침 다시 셔터를 올릴 것만 같은 고요함.
그 찰나, 머릿속에서 1998년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장면들이 필름이 돌아가듯 선명하게 재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떨림: 《접속》, 《시월애》, 그리고 《동감》

우리에겐 사랑을 전하기 위해 ‘기다림’이라는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유니텔과 나우누리의 푸른색 모뎀 접속음 사이로 낯선 영혼과 교감하던 《접속》(1997)의 PC통신 대화창,
시간의 틈을 건너 일마레(Il Mare) 앞 낡은 우체통에 손편지를 넣고 답장을 기다리던 《시월애》(2000),
그리고 개기월식이 일어나는 밤, 잡음 섞인 무전기 너머로 1979년과 2000년의 목소리가 닿았던 《동감》(2000).
스마트폰의 메신저 숫자 '1'이 1초 만에 사라지는 지금의 세상과 달리, 그 시절의 사랑과 관계는 언제나 ‘현상과 인화의 시간’을 필요로 했습니다.
사진 한 장을 보기 위해 필름 롤을 감아 사진관에 맡기고 며칠을 기다려야 했던 그 느릿한 기다림. 그 공백 속에서 피어오르던 애틋함의 한가운데에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의 정원(한석규)이 서 있었습니다.

가장 담담해서 가장 먹먹했던 이별의 예행연습

시한부 판정을 받고 생의 마지막 계절을 지나고 있는 서른셋의 사진사 정원.
영화는 그에게 비극적인 절규나 눈물범벅의 신파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대신 정원은 자기가 떠난 뒤 홀로 남겨질 사람들의 일상을 조용히 정돈합니다.
친구들과 모여 유쾌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낡은 앨범 속 옛사랑의 사진을 정리하고,
그리고 영정 사진을 찍으러 온 동네 할머니의 옷매무새를 다정하게 만져주며 가장 고운 미소를 렌즈에 담아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며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장면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비디오와 TV 리모컨 다루는 법을 몰라 쩔쩔매는 늙은 아버지를 보며 정원은 리모컨 작동법을 가르쳐주려 합니다.
"아버지, 여기 전원 누르고, 채널은 이렇게 올리고..."
그러나 귀가 어두운 아버지는 몇 번을 가르쳐줘도 자꾸만 다른 버튼을 누릅니다.
순간 울컥 치솟는 답답함과 슬픔에 정원은 방을 뛰쳐나가 소리를 지르지만, 이내 홀로 책상 앞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공책에 꾹꾹 글씨를 눌러 적습니다.
1. 붉은 단추를 누른다 (전원)
2. 3번 단추를 누른다 (비디오 채널)
3. 볼륨은 여기를 누른다...
내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가 혼자 TV를 켜고 적적한 밤을 달랠 수 있도록, 큰 글씨로 한 자 한 자 남겨두는 그 공책.
군산의 초원사진관 창문을 들여다보는 순간, 내 곁에서 흰머리를 쓸어 넘기며 "참 정겨운 곳이구나"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버랩되어 목 끝이 시큰해졌습니다. 사랑이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내가 떠난 자리에도 상대의 일상이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는 저 서투른 손글씨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불쑥 찾아온 사람

그렇게 담담하게 삶의 마지막 장을 넘기던 정원의 적막한 일상에, 거짓말처럼 한여름의 눈부신 햇살 같은 사람이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구청의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
땀에 젖은 제복 차림으로 단속 필름을 빨리 인화해 달라며 투정을 부리고, 더위를 식히기 위해 선풍기 앞에 턱을 괴고 앉아 재잘거리는 그녀.
무겁고 가라앉아 있던 사진관 안으로 다림의 웃음소리가 스며들 때마다, 흑백 같던 정원의 생에는 다시금 총천연색의 생기가 번져나갑니다.
"아저씨, 좋아하는 남자친구 없어요?"
"없어요, 다들 시시해요."
"에이, 좋아하는 남자친구 생기면 달라질걸?"
"모르죠, 뭐."
"꽉 잡아요, 이렇게."
빨간 스쿠터 뒤에 다림을 태우고 군산의 언덕길을 달리던 정원의 얼굴에 번지던 환한 미소.
두 사람은 끝내 "사랑한다"는 고백 한마디를 나누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걷다 소나기를 만나 처마 밑을 달리고, 팥빙수를 나누어 먹고, 군것질거리를 건네며 수줍게 눈을 마주칠 뿐입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왜 나만 보면 웃어요?"
그 물음에 정원은 그저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로 답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알기에 욕심내어 다가서지 못하고, 그저 그녀가 사진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마다 가슴 가득 채워지는 고마움과 설렘을 미소로 흘려보냈던 것입니다.

겨울, 눈 덮인 초원사진관과 남겨진 기억

정원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면서, 사진관의 셔터는 굳게 내려집니다.
이유도 모른 채 닫힌 문 앞을 서성이던 다림은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어보기도 하고, 차오르는 원망과 야속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깨뜨리기도 합니다.
병원에서 잠시 빠져나와 자신이 없던 동안 다림이 남겨둔 편지를 읽고, 다시 유리창을 새로 갈아 끼우며 정원이 흘렸을 침묵의 눈물을 생각합니다.
그는 끝내 자신의 병을 알리지도, 그녀를 불러내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그녀의 눈부신 청춘에 슬픔의 짐이 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찾아온 하얀 겨울.
소복이 눈이 쌓인 초원사진관 쇼윈도에는 다림이 알지 못했던, 가장 밝고 아름답게 웃고 있는 그녀 자신의 흑백 사진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코트 깃을 여미며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림의 얼굴에, 원망 대신 아련하고 따스한 미소가 번져납니다.
비록 정원은 세상에 없지만, 그녀는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그 여름날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크고 찬란한 빛이었는지를.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흐르던 한석규의 담담한 독백은, 세월이 흘러 마흔을 훌쩍 넘긴 지금 다시 들어도 가슴 깊은 곳을 울립니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에필로그: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 속에 빛으로 남는다

초원사진관 앞을 서성이며 우리 가족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초록 차양 아래 서서 어색하게 웃으시는 부모님, 그 곁에서 장난치듯 포즈를 취하는 아내와 아이의 얼굴.
젊은 날의 나에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슬프도록 애틋한 청춘의 러브스토리였습니다.
그러나 치열하게 현장을 누비고, 사람을 책임지고, 부모님의 굽은 등을 바라보게 된 지금 마주한 이 영화는 '삶과 시간에 대한 가장 고요하고 단단한 예의'에 관한 이야기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의 삶을 살아가는 정원과 다르지 않습니다.
누구도 시간의 흐름을 멈출 수 없고, 언젠가는 사랑하는 이들의 곁을 떠나야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마주 앉아 나누는 따뜻한 눈빛, "밥은 먹었니"라는 투박한 안부, 그리고 리모컨 작동법을 가르쳐주듯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소한 배려들이야말로 생의 가장 눈부신 기적일 것입니다.
8월의 뜨거운 여름날에도 마음속에 하얀 성탄의 눈을 품을 수 있었던 정원처럼,
먼 훗날 내 소중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나 또한 서글픈 상실이 아니라 '언제 떠올려도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번지는 따스한 빛'으로 남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군산의 가을바람 속에서, 지나온 계절과 곁에 있는 가족들을 향해 마음속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