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를 읽고
전략의 서재에 찾아온 뜻밖의 온기
나의 서재는 오랫동안 치열했다. 경영 전략, 마케팅 수치, 역사 속 거장들의 승패와 제왕학…
숫자를 뚫어내고 조직의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영업의 최전선에서 책은 늘 나에게 승리를 위한 무기이자 지도였다. 목표를 향해 가속도를 내야 하는 삶 속에서 소설이란 어쩌면 한가로운 여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다 우연히 손에 쥐게 된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이 정갈한 장편소설 한 권이 치열했던 나의 서재 분위기를 조용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목적을 가지고 읽는 책이 아닌, 사람의 결과 공간의 온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독서가 주는 위로가 생경하면서도 깊게 다가왔다.
잘 보일 마음은 없지만, 예의가 배어 있는 당당함
소설 속 여러 인물 중 유독 내 시선이 오래 머문 캐릭터는 청년 '민준'이었다. 책 속의 문장은 그의 눈빛과 태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하나로 읽히지 않는 눈빛. 오래도록 알아가며 대화 나누고 싶은 눈빛. 영주는 민준의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억지로 꾸미지 않는 태도였다. 영주에게 잘 보일 마음이 별로 없다는 태도. 그러면서도 예의가 배어 있는 태도."
무한 경쟁의 비즈니스 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주 둘 중 하나의 오류에 빠진다. 상대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지나치게 자신을 포장하고 굽히거나, 혹은 반대로 당당함을 가장한 채 거칠고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준이 보여주는 당당함은 차원이 달랐다. 억지로 잘 보이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지만, 기본과 예의는 몸에 배어 있는 상태. 눈빛은 가볍거나 굴종적이지 않고 자신만의 단단한 내공을 품고 있으면서도, 타인을 대하는 태도에는 세련된 예의가 흘러넘친다.
'그래, 바로 이거다.' 내가 현장에서 수많은 리더와 인재를 만나며 가장 높이 평가했던 사람들의 모습도 그러했다. 구걸하지 않는 자신감,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깊이감, 그리고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한 사람의 품격. 민준의 눈빛에서 나는 진짜 실력자가 갖추어야 할 유연한 당당함을 보았다.
선을 지키는 예의가 주는 '안도감'
또 하나 가슴을 친 대목은 서점을 찾은 손님 정서가 말한 '안도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기에선 내 쪽에서 예의를 지키는 한 아무도 나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겠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이 들었어요."
그리고 이 모습을 바라보며 바리스타 승우가 되새기는 지혜는, 사람을 다루고 조직을 지휘해 온 나의 경험과 정확히 궤를 같이했다.
"질문해도 될지 모르겠을 때는 질문하지 말 것.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듣는 역할에 충실할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최소한 무례한 사람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치열하게 성과를 독려하던 시절에도 내가 늘 가슴속에 품었던 경계심은 '호기심과 관심이 무례함으로 변질되는 순간'을 가늠하는 일이었다. 선을 넘지 않는 절제, 상대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하며 경청하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타인에게 깊은 '안도감'을 주는 진짜 리더십의 조건이다. 내가 상대에게 예의를 지키는 한 나의 인격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확신, 그 안도감이 흐르는 공간이야말로 사람이 모이고 성과가 피어나는 최고의 일터가 아닐까.
방금 내린 커피 한 잔에 담긴 현재와 미래
민준이 서점에서 커피를 내리는 장면에 이르러, 나는 삶을 대하는 또 하나의 소중한 태도를 배운다.
"청소를 할 때 청소에만 집중하면 집이 얼마나 깨끗해지겠어요. 커피 내릴 때 커피에만 집중하니까 커피 맛이 좋아지는 건 당연하잖아요. 커피 한 잔이 민준 씨에겐 현재에서 미래까지의 삶이라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요."
우리는 자주 오지도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거나 지나간 과거의 성패에 매여 현재를 놓친다. 그러나 커피 한 잔을 내릴 때 오직 그 순간의 원두와 물의 온도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몰입, 그 단단한 '현재'들이 모여 비로소 흔들리지 않는 미래가 완성된다.
그동안 수많은 현장에서 위기 상권의 막힌 혈을 뚫어낼 수 있었던 본질 역시 거창한 담론이 아니었다. 오늘 내 눈앞에 놓인 문제 하나, 내 앞의 사람 한 명에게 쏟아부었던 순수한 집중력이 만든 합작품이었다.
에필로그: 깊은 눈빛과 담담한 예의로
17년의 안락했던 성공 관성을 비워내는 '언러닝(Unlearn)'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지금, 이 한 권의 소설은 나에게 조용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억지로 나를 증명하려 안달하지 않아도 괜찮다. 내 안에는 이미 지나온 현장의 수많은 기록과 노하우, 그리고 앞으로 펼쳐낼 단단한 가치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눈빛에는 내공과 자신감을 담되, 타인과 세상을 향해서는 겸손하고 정갈한 예의를 갖추는 것. 방금 내린 향기로운 커피 한 잔처럼 내 앞에 주어진 현재에 온전히 몰입하는 것.
휴남동 서점이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전해주었듯, 나 역시 묵묵한 깊이와 담담한 예의를 갖춘 당당한 모습으로 나의 다음 무대를 조용히 준비해 본다.

